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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붕대 감기 / 윤이형

책 읽고 간단한 감상 남기는 것도 이렇게 힘들다니! 미루다가 겨우 쓴다.

다양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책. "절대로 세상과의 끈을 놓아버리고 '무식한 아이 엄마'로만 남지 않겠다고" 결심했던 일하는 엄마, 미용 산업이 "여성을 아름다움에 억지로 묶어 자유를 빼앗는" 일은 아닐까 고민하는 헤어디자이너 등, 시대에 따른 변화, 다양한, 그러나 이렇게 몇 마디로 뭉뚱그려질 수 없는 고민들을 섬세하게 쓰고 있다. 그 과정에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다투기도 하지만 결국 느슨한 형태로 함께 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단순한 진심(조해진)>에서 처럼 모든 인물의 사정이나 심리가 이해 가는 책이었다.

 

또 정말 '지금'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때문에 다 읽고 난 후 생각이 많아지기도 했지만 동시에 작가가 나와 함께 현재를 살아가면서 나름의 해석을 제시해주는 것 같아 든든했다 (소설이 코로나 이후의 세계를 어떻게 해석하게 될지도 궁금하다).

 

 

가로 폭이 좁아서 한 페이지에 들어가는 글자 수가 적고, 중간중간 위의 사진처럼 한 페이지 전체를 할애해 중요한 대사를 배치해 놓은 부분도 있어서, 읽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아래는 좋았던 부분 인용.

음식점에서는 복잡하게 이것저것 골라야 하는 단품 메뉴보다 주방장이 '오늘의 특선'으로 정해 내주는 오마카세 메뉴가 각광받았다. 온라인 쇼핑몰에서도 일주일에 한 번, 혹은 두 번씩 큐레이터가 구색을 맞춰 선별한 과일과 채소 꾸러미를 배송해주는 서비스가 인기를 끈 지 오래였다.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자기 삶에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알지 못했다. 그것을 숙고하는 데 들일 시간과 집중력과 에너지가 없었다. 타인이 선택을 하고 먹기 좋게 만들어 입에 직접 떠 넣어줘야 소비를 했다. (p8)

요즘 나의 소비 형태...

모두가 자신의 표정을 신경쓰며 조심하는 분위기 속에서 은정은 미워할 사람을 찾아 헤맸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p25)
그것에 대해 무엇을 느낄 만한 자리 자체가 내 삶에는 없다는 걸 네가 이해하게 되면 더 놀랄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사실이야. 내가 삶으로 꽉 차서 폭발해버리지 않게 하려면 나는 나의 어떤 부분을 헐어서 공간을 만들어내야 하는데, 그렇게 얻어낸 공간에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오는 부정적 감정을 채울 수는 없다는 것, 내가 살아온 삶의 궤적을 전혀 모르고 내 삶을 대신 살아줄 것도 아닌 사람들을 존중하기 위해 내가 선택한 삶에 대한 미움을 집어넣을 수는 도저히 없다는 것, 그게 내가 해낼 수 있었던 최선의 생각이야. (p64)
그때는 온몸을 던진 저항을 의미하던 것들, 세연이 마음을 바쳐 경배하고 떠올리는 것만으로 마음이 참을 수 없이 뜨거워지던 그것들이 이제 이 학생들에게는 여자들을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비참함에 묶어놓는 무기력과 패배주의의 상징이 되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p85)

세대별로 생각하는 게 정말 다르구나 하는 걸 요즘에 부쩍 실감할 일이 많았는데, 우리 세대에는 당연하게 진실로 여겨지는 것들이 다른 세대에게는 말도 안 되는 거짓인 경우가 많다. 같은 세계를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각 세대가 처했던 혹은 처한 사회적 현실이 분명히 다르다는 걸 느끼게 된다.

아무튼 세상은 무서운 곳이니까 여자는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는 게 요지였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세연은 어째선지 조금 마음이 편했는데, 그건 '여자'라는 말이 자신뿐 아니라 다른 아이들의 블라우스 밑 가슴께에도 족쇄처럼 채워져 있어서, 숨이 막히는 게 자신 뿐은 아니라는 생각, 간신히 다른 아이들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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