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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아직 멀었다는 말/ 권여선

표지가 너무 예쁘다. 표지는 그림인지 사진인지 실제로 보면 더 예쁘고 무광 재질인데 책등은 반짝반짝해 그 차이도 좋다. 양장에다가 비닐로 싸여 있어서 왜지 했는데 싸인본인 것 같다. 집에 책을 놓아둘 곳이 없어 읽은 책은 웬만하면 바로 팔자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되어버렸으니 팔 수 있을까 모르겠다. 하루 만에 빠르게 읽은 편이었다. 수록작이 모두 좋았고 그중에서도 "손톱"과 "송추의 가을"이 개인적으로는 가장 좋았다. 그동안 권여선 작가의 소설은 좀 침울하고 가라앉는 느낌이라서 쉽게 손이 가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 소설집이 이렇게 좋았다는 게 내게는 의외였다. 이번 소설들도 대체적으로 어두운 분위기지만 유독 소설 속 인물들에게 애정이 가서 일지도 모르겠다.

 

아래에 포스트잇이 붙은 자리를 정리해 둔다.

 

손톱

소희는 어느새 빌딩 쇼윈도 앞에 바짝 붙어서 있다. 티끌 하나 없이 깨끗이 닦인 유리 너머로 외제 자동차들이 손에 잡힐 듯 반짝거린다.
내가 어쨌다고? 내가 뭘, 뭘, 뭘? 뭘? 뭘? 뭘?
소희는 다친 개처럼 유리에 대고 짖었다. 뭘, 뭘, 뭘, 외칠 때마다 유리에 김이 서렸다. (p. 73)

<아직 멀었다는 말>의 소설들에서는 이렇게 어디에 대고 외치는, 참았다가 터트리고 화내는 부분이 꽤 등장한다. 그때마다 슬펐는데 그중 이 소설에서 가장 슬프고 화가 났다. 자신의 잘못도 아닌 불행으로 남들이 누리는 최소한의 무엇도 누리지 못했고, 그 안에서 완전히 절망하거나 포기하는 게 아니라 열심히 손발을 움직여 살아가려 하지만 그것조차 소용없는 소희의 삶이 답답했다. "손톱"을 다 읽은 후에도 소희가 계속 생각났다.

 

내 답답함과 뭔지 모를 짜증남을 백지은 평론가가 해설에서 너무나 명쾌하게 설명해 줘서 그 부분도 표시해 두었다.

"손톱"은 소희라는 외롭고 나약한 인간의 무력함을 안타까워해야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악행과 악덕이 자연스러운 일부가 된 야비한 세상을 미워해야 하는 이야기다. 이 인물들이 아픈 것은, 이들이 개별적으로 병에 걸린 환자여서가 아니라 가학적인 환경에 노출된 약자이기 때문이다. 반복 건대 권여선 소설의 인물들이 겪는 갖가지 고통은 그들 개인에게 귀속되는 불행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책임을 물어야 할 부당함, 불공정, 불평등이다. 그들의 고통에서 당신이 슬픔을 느꼈다면, 그 고통의 당사자를 불행의 주인으로 알아서가 아니라 우리가 속한 사회의 부정을 대신 겪어내는 누군가로 여겼기 때문이리라. 그 슬픔은 누군가의 단독적인 아픔을 알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 인간들 사이의 근본적인 의존성을 생각하게 만든다. 이번 소설집에서 우리가 타인에 대해 느낀 슬픔은 공감보다는 책임감일 것이다. (p. 265)

이 부분을 읽으며 할 수도 있지만 하지 않는 일에 대해서도 나는 책임이 있다. 소희가 동정보다는 실질적이며 제도적인 도움을 받았으면 하는 생각이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들었다.

손이 왜 그래?
다쳤어요.
조심해야지.
네.
껌을 씹으며 소희는 여행 잡지를 보고 할머니는 부채 모양의 경전을 본다. 소희가 고개를 들자 할머니도 고개를 들었다. 소희가 희미하게 웃자 할머니의 얼굴 주름도 조금 옆으로 움직였다. 저건 할머니가 웃는 거다. 대화가 안 된다 매가리가 없다 무나아안하다 생각이 없다, 그런 말 대신 조심해야지, 하고 말해준 사람이 웃는 거. (p. 81)

 

희박한 마음

이 소설도 무척 좋았는데, 짐작하면서 읽게 되는 소설이었다. 그러다가 마지막쯤에 가서야 상황의 전말(?)이 분명하게 밝혀지는 소설이고 그걸 알고 나면 굉장히 또 안타깝고 슬픈 ㅠㅠㅋㅋ... 그래서 이 소설 만큼은 아무 정보도 없이 읽어야 더 재밌을 것 같아 혹시 몰라 인용문을 옮기지 않는다.

 

너머

너머는 아주 짧게 요약하자면 아픈 어머니를 둔 기간제 교사의 이야기다. 정교사, 기간제 교사, 정규직, 비정규직, 또 그 안에서도 촘촘히 나눠져 있는 서열, 요양병원 간병인 이야기 등 사회적 문제가 한 사람을 어떻게 몰아가는지를 그렸다.

N은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듯 움츠러들었다. 병문안을 마치고 승강기에 올라 운동을 끝내고 내려가는 사람들의 향긋한 샴푸 냄새에 둘러싸여서야 비로소 N은 8층에서 내내 자신을 사로잡았던, 사지 육신이 멀쩡한 데 대한 송구함과 가급적 활발한 움직임을 자제해야 할 것 같은 위축감에서 해방되는 대신, 다시금 낯선 젊은 이들이 벌이는 혼탕의 축제 한복판에 던져진 듯한 이질감과 소외감을 느꼈다. (p. 123)

이 부분 글이 좋아 옮겨 놓는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는 말을 이렇게 풀어낼 수 있다니!

영양액만 주입받는 탓에 어머니의 몸무게는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평생 가난한 살림을 쥐어짜듯 살아온 관성으로 이제 더 쥐어짤 무엇이 그것밖에 없다는 듯 당신 몸을 자꾸 쥐어짜고 있는 듯했다. N은 이렇게 점점 작고 가벼워져 제로에 수렴하는 몸을 상상해보았다. 그러자 문득, 이 사람 몸이라는 게 말입니다, 라던 교장의 말이 생각났고 머리가 띵할 정도로 화가 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p. 148)
모든 걸 쓸어버리는 폭풍의 시간이 지나간 후 N은 누군가에게 용서를 구하듯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늦가을 오후의 볕이 은실처럼 내리쪼이고 있었다. 버릴 수 없는 것들이 있다고, N은 흐느끼면서 생각했다. (p. 150)

 

친구

전철역 계단을 내려가다 그녀는 오른손과 왼손을 번갈아 보며 뭔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왼손에 든 다이어트 식품을 먹고 살을 빼면 오른손에 든 옷들은 필요 없고 그 옷들을 입으려면 다이어트 식품이 아무 효과가 없어야 한다. 그렇다고 어떤 쪽으로도 결정이 나지 않은 지금 둘 중 어느 것을 버릴 수도 없었다. (p. 157)

이 부분은 나도 분명 이런 상황을 겪었던 것 같은 느낌에 표시해 두었다. 둘 다 가질 수 없다는 건 알지만 뭐가 어떻게 될 지 몰라 아무것도 놓지 못하고 있는 것, 그것 때문에 버거운 느낌이 불편한 신발을 신고 양 손 가득 무거운 짐을 들고 걷는 신체적 불편함과 더불어 실감 나게 다가왔다.

 

송추의 가을

"송추의 가을"에서는 등장인물 모두의 캐릭터와 그 사이의 미묘한 갈등이 눈에 보여서 그게 재밌었다.

큰형이 혀를 쯧쯧 차더니 절름거리며 세워둔 차 쪽으로 걸어갔다. 누나가 그의 등뒤에 바짝 붙어서며, 아유, 오빠가 다 들었나 봐, 어떡해, 어떡해, 하고 다급하게 속삭였다. 오래전 누나는 어린 그를 등에 업고 내려놓지를 못했다고 했다. 내려놓으면 울고 내려놓으면 울어서 하루 종일 허리가 끊어지도록 업고 있었다는데, 지금 이 순간 그는 큰형이 미워선지 누나가 싫어선지 목덜미에 끼얹어지는 누나의 뜨뜻한 숨결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등에서 떼어내 냅다 밀어붙이고 싶은 걸 업어준 은혜를 봐서 참느라 그는 햇빛에 비친 돌확의 은빛 테두리만 노려보고 있었다. (p. 185)

 

개인적으로는 이 소설이 제일 어렵고 이해하기 힘들었다. 인물의 상상 묘사가 많고, 또 정작 주변 인물과는 아무하고도 제대로 의사소통이 안되는 것 같고 그런 이유 때문이었던 것 같다.

어느 순간 그는 무엇인가 익숙한 것이 자신을 슬쩍 건드리고 지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부른 것 같기도 했다. 주위를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그를 주목하고 있지 않았다. 다만 허공에 매달린 전광판의 대기자 이름 끝에 그의 이름이 반짝 떠올라 있었다. 설마 저것이었나. 그는 알 수 없었다. 그가 글을 익힌 이래 오십 년 넘게 보아온 자신의 이름, 그 익숙한 문자의 모양이 전광판에 떠오르면서 그를 건드린 것일까. 듣고 싶지 않아도 귀에 들리는 소리처럼, 보고 있지 않아도 눈을 뚫고 들어오는 어떤 형태나 이미지가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눈도 스스로 선택하고 배제하는 기관이 아니라 귀처럼 뻥 뚫린 두 개의 무방비한 구멍일 뿐인가. (p. 198)
아무리 생각해도 그는 이 장면이 그레고르에 대한 냉혹한 예언처럼 생각되었다. 긴 병원 건물은 벌레가 된 그레고르의 연약한 둥근 머리를 관통하는 잿빛 쇠막대처럼 여겨졌고, 더 나아가 어쩌면 모든 병원이 작은 창문 속 병실에 갇혀 있는 환자들을 불가능한 삶의 희망을 볼모로 꼬치처럼 꿰고 있는 쇠꼬챙이 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환자들은 쓸모없는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 가족의 재산을 갉아먹는 해충 같은 존재들이며 결국엔 가족의 행복과 안녕을 위해 바삭한 껍질만을 남기고 죽어야 하는 그레고르의 운명인지도 모른다고. (p. 203)

 

좋은 책을 읽어서 기쁘다! 사실 막 읽고 났을 때는 그 기쁨이 더 분명했는데 정리를 미루다 보니 이제는 기억이 잘 안 나는 부분도 좀 있고, 여기에는 왜 포스트잇을 붙였을까 싶은 부분도 있지만 그래도 꼭 추천하고 싶은 책. 다들 읽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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