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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단순한 진심/조해진

조해진 작가의 소설은 세 권 째 읽는다. 2017년 단편집 <빛의 호위>로 조해진 작가의 소설을 처음 접하고 너무 좋아서 장편 <여름을 지나가다>를 찾아 읽었다. 정확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외롭고 약한 사람들끼리의 연대와 따뜻함 같은 게 느껴졌던 소설이었다. 최근 출간된 장편 <단순한 진심>도 비슷하게 착하고 따뜻한 이야기.

 

어릴 적 철로에서 홀로인채 기관사에게 발견되어 이후 프랑스로 입양 가게 된 '나(나나, 문주)', '서영'은 그런 '나'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고 싶다고 '나'를 한국으로 초대한다. 그렇게 '나'는 한국에 와 우연처럼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몰랐던 사실들을 알게 되면서 마음의 파장이 바뀌게 된다.

 

처음엔 입양인을 너무 전형적으로 묘사한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입양 간 곳에서 느끼는 소외감, 이방인으로서의 슬픔, 어쩔 수 없이 어른스러운 아이가 될 수밖에 없는 것, 마음 한편에서 느끼는 허전함 등... 이 책에 나오는 입양인들은 대부분 이렇게 묘사된다. 그렇지만 주말 이틀을 쉬었을 뿐인데 월요일 어린이집에서 친구들과 선생님을 어색해하는 어린아이들을 생각하면, 나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 없는 낯선 곳을 집으로 삼아야 하는 마음이 이럴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고.

 

그래도 이 소설이 착하고 따뜻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인물 모두의 심정이 사려깊게 묘사되어있고, 개중 이해가지 않는 인물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점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배제되고 고통받았던 삶들도 따뜻한 시선으로 서술하고 있다. 문장도 좋고 읽는데 긴 시간이 걸리지도 않으니, 다들 읽어봤으면!

 

좋았던 부분을 정리해둔다.

 

철로 같은 곳에 버려진 아이라면 그 어디에도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게 마땅하다고 그는 여겼을 수 있으므로. 그렇다면 문주는 선의가 아니라 무시와 조소로 빚어진 이름이었던가. 맞은편 차창을 건너다봤다. 열차 창밖으로 흘러가는 풍경은 인천과 서울에 걸쳐 있는 선명한 여름의 일부였는데도, 내 눈에는 유해한 먼지가 뿌옇게 내려앉은 멸망하기 직전의 도시가 보이는 듯했다. (p. 38)
가장 먼저 움직인 사람은 소율이었다. 소율이 긴 막대 모양의 마이크를 내 쪽으로 기울이자, 어리둥절한 얼굴로 전광판과 나를 번갈아 보던 서영이 이내 무언가를 감지한 듯 카메라를 들고 철로로 내려와 촬영을 시작했다. 촬영이고 뭐고 어서 올라오라고 다그치던 은은 지체할수록 위험하다는 서영의 말에 그제야 몇 걸음 뒤로 물러나 조명판을 들어 올렸다. 그들도 모를 수 없을 터였다, 먼지처럼 살아온 떠돌이에게는 플랫폼보다는 안정성이 보장되지 않는 철로가 더 어올린다는 걸. 게다가 그 떠돌이에게 철로는 정체성을 대변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철로를 지나가는 여름 바람에서 떫은 풀 냄새가 났다. (p.62)
정문주보다 박에스더라는 이름 안에서 거주한 기간이 더 길었는데도 그 이름에는 애정도 집착도 갖지 않았던 건, 고아원 생활에서는 내 고유한 경험이랄 게 거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비슷비슷한 이름들, 정해져 있는 시간표, 다른 고아들과 똑같은 분량으로 공유했던 결핍감과 불안감, 베로니카 수녀를 비롯한 여러 어른들의 평균적이고도 관습적인 애정, 그리고 때가 되면 해외로 입양되어 떠나는 아이들의 빈자리가 또 다른 아이들로 채워지는 무심한 반복이 내 감각을 무디게 했던 것이다. (p.81)
스물일곱 개의 계단을 지나 이 세계의 마지막 출구 같은 현관문을 열었고, 서영의 집으로 들어간 뒤엔 그대로 현관문에 등을 기대었다. 현관문 너머는 정해진 시나리오가 있어 나같은 이방인은 끼어들지 않아야 비로소 완전해지는 세트장 같다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었다. 그곳에서 내 역할은 이미 오래전에, 내가 프랑스 국적의 나나로 살게 되면서부터 사라졌을 것이다. 하긴, 문밖의 세계란 언제나 평면으로 펼쳐진 사각형으로 정형화되어 기억되는 곳이었다, 진짜 스크린처럼. (p.108)
바로 복희가 내 삶에 개입한 배우라면 내게도 복희를 보호할 의무가 있다는 사실을. 보호, 그건 앙리와 리사, 그리고 정우식 기관사가 내게 취한 태도이자 행동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하나의 생명을 외면하지 않고 자기 삶으로 끌어들이는 방식... (p.130)
서영의 말을 들으며 사진 한 장 한 장을 다시 유심히 들여다보는데, 어느 순간 끝이 둥글게 말린 바람이 불어와 머리칼을 헝클어트렸다. 그러고 보니 서울의 더위는 한풀 꺾여 있었다. 머리 위로 내리꽂혔던 직선의 태양열은 이제는 부드럽게 낙하하는 듯 느껴졌고, 나무마다 정점에 올랐던 초록의 농도도 확실히 묽어져 있었다. 우주가 이 여름을 지나 다가오는 가을과 초겨울 동안 태아라는 본분에 맞게 잘 자라 준다면, 올해 말이나 내년 초에 나는 우주와 만나게 될 터였다. 왜곡과 술수를 모르는 시간의 정직함이 지금 내게는 위로이자 안도였다. (p.184-185)
자기 연민은 생이라는 표면에 군데군데 나 있는 깊고 어두운 굴 같은 것이어서 발을 헛디뎌 그곳에 빠질 수는 있어도 그 누구도, 영원히, 그 굴 안에서만 머물지 못한다. (p.192)
"근데, 이젠 이 몸뚱이 하나가 전부라고 하네. 온갖 오물 썩는 냄새가 나고 아무도 만져 주지 않는 늙은 몸뚱이, 참 신기하다, 나는...... 이렇게 순식간에 늙어버렸다는 게, 여기서 더 외로워질 수가 있다는 게, 신기하고 재밌어. 더 살날이 남았다는 게, 내일도 눈 뜨고 일어나야 한다는 게......" (p. 212)
먼 미래의 어느 날, 아마도 여느 떄보다 깊은 외로움이 밀려오는 날, 내 외로움은 노파의 오래된 하루를 빌려 그렇게 완성되어 갈 것이다. 내 것인지 노파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저쪽으로 전가되었다가 다시 이쪽으로 전가되는 실타래 같은 외로움이. 인생은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쏜살같이 지나가고 그 밑바닥에 정제되어 남는 건 외롭게 쓰라린 것...... (p. 213)
삶의 어느 장면에서 우리는 같은 자세로, 같은 표정으로, 같은 생각을 하며 투명한 벽 앞에 서 있곤 했을 것이다. 얼굴의 일부가 아니라 생애의 접힌 모서리가 절박하게 닮은 사람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p. 220)
재료 손질이 끝날 즈음, 나는 결국 백복희에게 전화하지 않기로 결심을 굳혔다. 진실을 유예하면서 보호받는 시간 또한 삶의 일부라고, 나는 믿기로 했다. (p. 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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