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리뷰

오테사 모시페그 <내 휴식과 이완의 해> 후기

재미없는 책도 읽기 힘든 책도 아닌데 읽는데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뭔가 좀 주인공이 우울하고 무기력하니까 같이 스트레스받는 느낌... 주인공은 외모도 예쁘고, 좋은 대학에 나오고, 부모님이 물려주신 재산도 꽤 되고, 당분간은 일을 굳이 안 해도 살아갈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다 가진 사람 같지만 어릴 때부터 부모님에게 충분한 사랑도 받지 못했고, 어쩌면 그 영향인지 남자도 잘못 만났고..., 결과적으로 굉장히 냉소적이고 무기력한 사람이 되었다. 지쳐버린 주인공은 불면증이라고 속이고 정신과 의사에게 약을 받아 한 해 동안 잠만 자면서 시간을 보내고, 이후에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기로 결심한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웃기면서 우울한 분위기였다. 등장 인물들이 특징적이고 재밌다. 괴짜 정신과 의사 닥터 터틀도 재밌었고, 정말 이상해서 모든 게 꿈인가 싶은 느낌도 있었다. 또 '리바'라는 인물이 주인공 친구로 나오는데 주인공에게 심하게 열등감을 느끼고(특히 외모적인 면에서) 과거를 부정하며 주류 세계에 적응하고자 안간힘을 쓰는 인물이다. 겉모습에 집착하여 폭식과 구토를 반복하는 인물. 그렇지만 주인공이 하루 종일 집에 있을 때 찾아오는 유일한 인물. 주인공은 그런 리바를 냉소적으로 본다.

 

이렇게 보니까 주인공이 왜 일종의 우울증에 시달리게 됐는지 알겠다. 부모님은 날 사랑했는지도 모르겠고, 그것도 이미 둘 다 죽었고(엄마는 자살로 아빠는 병으로) 남자친구는 착취적으로 주인공을 소모하다가 떠나버리고 하나 있는 친구도 저 모양. 처음엔 다 가졌는데 왜 그래! 했는데 읽다 보면 어느 면에서 지쳤는지 잘 알겠고, 마지막 부분에 가서는 조금 울컥하기도 했다. 주인공도 리바도 어떤 인생을 살든, 자기 삶 속에서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래는 좋았던 부분 정리

자매가 있으면 이렇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내 모든 결점을 지적할 만큼 나를 사랑하는 사람. (p.27)
삶은 연약하고 찰나이며 사람은 물론 조심하며 살아야 하지만, 나는 온종일 자는 생활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죽음을 감수할 참이었다. 그리고 나는 영리하니까, 약 때문에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라면 미리 감지할 거라고 판단했다. 심장이 멈추거나, 혹은 뇌가 터지든 출혈을 일으키든 7층 창문 밖으로 떨어지라고 날 조종하든, 그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예고성 악몽을 꾸기 시작할 거라고. 온종일 잘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이 잘 돌아갈 거라고 믿었다. (pp.41-42)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 공감이 되어서 표시해 두었다.

 

쓰레기를 복도로 가지고 나가 낙하장치에 던져 넣었다. 그 건물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 중 하나가 쓰레기 낙하 장치였다. 중요한 사람이 된 듯한 기분, 내가 세상에 참여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 쓰레기가 다른 사람들의 쓰레기와 섞였다. 나와 닿았던 물건이 다른 사람과 닿았던 물건과 닿았다. 나는 기여하고 있다. 연결되어 있었다. (p.146)

이 부분 정말 좋았다. 모든 걸 다 뒤로 하고 혼자 침대에서 잠만 자고 싶어하지만, 결국엔 어떤 방식으로 세상과 연결되고 싶어 하는 주인공의 심정이 잘 이해되어 좋았고, 그걸 쓰레기 낙하 장치에 비유한 점도 좋았다.

 

본격적인 리바 모드에 들어간 리바를 보는 일은 즐겁기도 하고 역겹기도 했다. 그녀의 억압, 속이 빤히 보이는 부인, 차에 탔을 때 부질없이 나와 함꼐 고통을 나누려 하던 일, 그 모든 것이 어떤 식으로든 내게 만족감을 주었다. 리바는 나 혼자서 닿지 못하는 가려운 자리를 긁어주었다. 자신이 대면한 심오하고 진정하고 고통스러운 무언가를 그토록 상투적으로 정확히 표현함으로써 망쳐버리는 그녀를 보며 나는 이유를 찾았다. 그녀를 멍청이로 여길 이유, 그래서 그녀의 고통을, 그리고 더불어 내 고통까지 깎아내려도 된다고 생각할 이유를. 리바는 내가 먹는 약과 같았다. 모든 것을, 심지어 미움과 사랑까지도 가볍게 쳐낼 수 있는 솜털로 변화시켰다. 내가 원하는 상태가 정확히 그런 것이었다. 내 감정이 지나가는 차의 전조등 불빛처럼 창문으로 부드럽게 들어와 나를 훑고 지난 뒤 어렴풋이 친숙한 무언가를 비추다가 다시 나를 어둠 속에 남겨두고 떠나가는 상태. (p.207)

무척 예리하게 주인공이 리바에게 혐오감을 갖는 이유를 설명해서 좋았고 마지막 문장도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비유인데 너무 공감되는 비유였다.

 

그녀가 가는 곳이 어디든, 주변의 모든 것이 그 자체의 패러디, 서툴고 웃기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걸 보면 마음이 편해졌다. 우피가 있어서 얼마나 고마웠는지. 그 무엇도 신성하지 않았다. 우피가 그 증거였다. (p.239)

정리하다 보니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군데군데 좋은 곳이 많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책도 두껍지 않고 어디서도 못 봤던 이야기여서 좋았다.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