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리뷰

영화 남매의 여름밤 리뷰

익숙해진다는 것은 서로에게 흔적을 남긴다는 뜻이다. "남매의 여름밤"은 낯선 집이 급조된 한
가족에게, 또 가족이 낯선 집에 흔적을 남기고 마침내 서로 익숙해지는 모습을 담은 영화다.
옥주는 고1 여름방학, 아빠, 남동생과 함께 할아버지의 낡은 양옥집에 신세를 지게 되고, 머지않아
고모도 남편과의 다툼 이후 가족에 합류한다. 저마다의 이유로 모인 가족은 세월이 두껍게 쌓인 집안
곳곳에 흔적을 남긴다. 이들이 모기장을 치고, 함께 요리를 해 먹거나 생일 파티를 하고, 치고받고
싸우고, 오래된 담금주를 꺼내 마시는 동안, 오랜 기간 할아버지에게만 익숙했던 집은 자신을 채운
새로운 가족에게도 점차 익숙해진다.
집도 가족의 마음에 흔적을 남긴다. 방울토마토를 따 먹은 텃밭이나, 쓸만해 보이는 자전거가 있던
계단실, 혼자만의 공간이 필요할 때 닫았던 중문, 비빔국수를 먹었던 식탁, 이층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풍경 같은 것들은 의식에서 잊히더라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아 아빠가 꾼 꿈처럼 언젠가 문득
떠오르게 될 것이다.
가족은 서로에게도 흔적을 남긴다. 영화 초반,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는 묘한 거리감이 느껴진다.
영화는 그 사정을 명확히 설명하지 않지만, 오랫동안 왕래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함께
콩국수를 나눠 먹고, 손을 흔들고 미소로 답하고, 모기장 안이나 베란다에서 대화를 나누면서 조금씩
거리를 좁혀간다. 노랫소리에 잠이 깬 새벽, 옥주는 할아버지가 소파에 앉아 김추자의 "미련"을 듣는
모습을 목격한다. 옥주는 할아버지 옆이 아니라 계단에 앉아 함께 노래를 들으며 할아버지의 시간을
존중하면서도 그날의 새벽 시간을 공유한다. 이 순간은 옥주의 마음에 중요한 흔적으로 남을 것이다.
한때 익숙했던 타인을 그리워하는 것도 결국엔 흔적을 확인하는 일일지 모른다. "남매의 여름밤"에서
이 과정은 꿈을 통해 이루어진다. 옥주는 고모에게 할머니, 그러니까 고모의 엄마가 보고 싶은지
묻는다. 고모는 보고 싶다고 말하며 할머니의 품에 안겨 건널목을 건넜던 꿈 이야기를 해준다. 아빠는
할아버지가 시답잖은 거짓말로 자신을 놀렸던 어린 시절을 꿈에서 다시 겪는다. “갈 수 없는 먼
곳이기에 그리움만 더하는 사람.”이라는 "미련"의 가사처럼 고모와 아빠는 익숙했으나 이제는 볼 수
없는 사람과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의 흔적을 꿈에서 만난 것이다. 옥주도 엄마가 할아버지의 장례식장에
찾아와 밥을 먹으며 웃는 꿈을 꾼다. 배신감에 부정하려고 했지만 옥주도 한 때 가장 익숙한
사람이었던 엄마를 그리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온 세 가족은 거실에 둘러앉아 밥을 먹는다. 할아버지가 "미련"을 듣던 맞은편
소파를 바라보며 옥주는 할아버지가 낡은 양옥집과 옥주 자신에게 남긴 흔적을 확인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옥주의 울음은 할아버지가 그립다는 마음을 제대로 들여다보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주변의
상황과 자신의 감정에 혼란스러워하는 옥주를 보며 느껴졌던 불안함이 조금 가셨다. 언젠가는 옥주도
제 마음의 흔적을 천천히 헤아린 후, 고모가 그랬던 것처럼 엄마가 보고 싶다, 할아버지가 보고 싶다, 또
할아버지의 집에서 보냈던 여름방학이 그립다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오길.